참 좋은 시와 글들

팔월상서

아주나09 2011. 8. 5. 14:02

팔월상서

                        -고은-

 

                                    아버지 세벌 김은 다 매셨는지요

마을의 가죽나무 잎사귀 늘어지고

어디에 그늘인들 바람 선선한 그늘이겠습니까

논물은 그런대로 괜찮은지요

이제는 동네방네 물코싸움도 덜하겠지요

제초약 뿌린다 해도

벼 속의 피 한 줄기는 질겨서

늙은 아버지는

바위박이 논뱀이 피사리를 하시는지요

밭두렁은 사나운 쇠비름 명아주풀

몇 섬지기 논에는 벼멸구 걱정이 떠나지 않겠지요

농촌지도소 말치레 그대로 따라서는 도려 큰일나지요

곡식 뿌리야 다치기 쉽고

심복 불볕에도 잔일손 쉴 수 있겠습니까

더덕 같은 손발 백도라지 허리는 어떠하시며

등거리 등때기 허물 얼마나 벗겨지셨는지요

볍씨 찰보리 종자 뿌려서 기르고

그것을 거두는 일밖에 없어도

우순풍조밖에 바랄 것 없어도

그 일이면 어느 나라 일보다 큰일 아닙니까

흰 구름도 때로는 눈코 뜰 새 없습니다

남의 것 내 것 할 것 없이

팔월 한 달의 들은 검푸르러서

산에라도 올라가면

그 드넓은 벙어리들이 무서운 우리입니다

산 것 하나도 숨지 않고

제 목숨 다 열어서 사는 제철입니다

여름은 으뜸으로 장합니다

산딸기 고름이 터지고

새터고개 으악새 서슬에 살을 베입니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에도 이미 아버지

태어나기를 논밭에서 태어나서

이웃집 쌍둥이 서방과 함께 늙으셨지요

모를 낼 때 거머리 피 빨리고

몇 십년 동안 김을 매어

어화자 지화자 아버지의 긴 허리 얼마나 굽으셨는지요

심기보다 기르기 어렵고 길러놓아도 걱정뿐이언만

토지수득세 연부상환 신곡 곡식값으로 걱정뿐이언만

마을 젊은이는 사내녀석도 쪼깐이들도 다 떠나고

늙스구레 해동갑 하루하루 빈 마을이언만

그래도 저녁나절 돌아오는 징소리 사이에

막내동이 깽매기소리가 요란하면

보릿대 연기로 자욱한 마을이

해 넘어간 쪽으로 아버지와 춤이 덩실 하나였지요

아버지 술 한 병 노랑태 한 죽 사가지고 가렵니다

아버지 산소에 가렵니다 아버지

 

 

'참 좋은 시와 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사랑  (0) 2011.12.07
9월의 시  (0) 2011.08.31
7월의 시-꽃은 지면서도  (0) 2011.07.08
6월의 시  (0) 2011.06.01
오월의 시  (0) 2011.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