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상서
-고은-
아버지 세벌 김은 다 매셨는지요
마을의 가죽나무 잎사귀 늘어지고
어디에 그늘인들 바람 선선한 그늘이겠습니까
논물은 그런대로 괜찮은지요
이제는 동네방네 물코싸움도 덜하겠지요
제초약 뿌린다 해도
벼 속의 피 한 줄기는 질겨서
늙은 아버지는
바위박이 논뱀이 피사리를 하시는지요
밭두렁은 사나운 쇠비름 명아주풀
몇 섬지기 논에는 벼멸구 걱정이 떠나지 않겠지요
농촌지도소 말치레 그대로 따라서는 도려 큰일나지요
곡식 뿌리야 다치기 쉽고
심복 불볕에도 잔일손 쉴 수 있겠습니까
더덕 같은 손발 백도라지 허리는 어떠하시며
등거리 등때기 허물 얼마나 벗겨지셨는지요
볍씨 찰보리 종자 뿌려서 기르고
그것을 거두는 일밖에 없어도
우순풍조밖에 바랄 것 없어도
그 일이면 어느 나라 일보다 큰일 아닙니까
흰 구름도 때로는 눈코 뜰 새 없습니다
남의 것 내 것 할 것 없이
팔월 한 달의 들은 검푸르러서
산에라도 올라가면
그 드넓은 벙어리들이 무서운 우리입니다
산 것 하나도 숨지 않고
제 목숨 다 열어서 사는 제철입니다
여름은 으뜸으로 장합니다
산딸기 고름이 터지고
새터고개 으악새 서슬에 살을 베입니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에도 이미 아버지
태어나기를 논밭에서 태어나서
이웃집 쌍둥이 서방과 함께 늙으셨지요
모를 낼 때 거머리 피 빨리고
몇 십년 동안 김을 매어
어화자 지화자 아버지의 긴 허리 얼마나 굽으셨는지요
심기보다 기르기 어렵고 길러놓아도 걱정뿐이언만
토지수득세 연부상환 신곡 곡식값으로 걱정뿐이언만
마을 젊은이는 사내녀석도 쪼깐이들도 다 떠나고
늙스구레 해동갑 하루하루 빈 마을이언만
그래도 저녁나절 돌아오는 징소리 사이에
막내동이 깽매기소리가 요란하면
보릿대 연기로 자욱한 마을이
해 넘어간 쪽으로 아버지와 춤이 덩실 하나였지요
아버지 술 한 병 노랑태 한 죽 사가지고 가렵니다
아버지 산소에 가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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