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일월 하순이었다. 3박 4일간의 홍도, 흑산도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섬 여행을 마치고, 아내와 아이들을 팽개치고 서울로 가는 일정을 포기하고 강진에 남았다. 영랑생가, 다산초당, 백련사 등 남도답사 일번지로 알려진 강진땅! 몇 번씩이나 와봤던 곳이지만, 내 맘속엔 오로지 산에서 숨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리운 악마생각뿐! 바쁜 M 형님을 졸라 강진의 어느 조그만 야산에 들어섰다. 햇살이 하루 종일 비추는 아담한 야산이었다. 옹기종기 언덕진 곳이 제법 많았고 춘란의 분포도 제법 많았다. 소심을 산채한 곳이니 잘 살펴보라는 M 형님의 안내가 무색하리 만큼 소심은 보이지 않고 잡목만이 무성하여 할 수 없이 왼쪽의 또 다른 자그마한 야산으로 이동하였다.
따뜻한 햇빛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가끔씩 느껴지는 으스스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얕은 야산!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옹기종기 언덕진 곳은 여인네의 가슴처럼 생긴 봉긋 솟은 무덤이요, 파여진 골은 이장된 흔적. 자꾸만 발목이 붙잡혀지는 것 같은 으시시한 공동묘지에서 약하다 할 만한 주금 하나를 채란하고 나는 듯이 빠져나왔다. 그 주금이 소장난에 올린 '공동묘지의 주금'이다. 화형이 특이하여 꼭 인상을 쓰는 것 같은 모양이지만 다행히 그 공동묘지 주금은 산채시보다 세력이 강해지고 있다. M형님께서는 해가 갈수록 강진 지역의 일조량이 좋아서 해가 갈수록 색이 진해진다고 했다. 올해는 꽃대를 달지 못했지만 세력은 여전히 좋아 내년에는 또 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2007년 1월 14일, 곡성 옥과에서의 시산제. 3년 전 이곳은 L 아우님의 중투 채란, L형의 소심, 그리고 나의 토선생 사건이 기억에 떠오른다. 당시 나는 난 대신 토끼를 산채하여 배낭에 넣고 다니다가 풀어준 적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토끼를 풀어줬던 그곳으로 나의 발걸음은 은근히 옮겨지고 있었다. 그때 그 토선생이 궁금하였고 나에게 뭔가를 점지해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귀가 시간까지 나는 겨우 산반 한포기를, 옆의 k갑장은 서반 하나를 채란하여 겨우 빈손을 면한 정도였다.
회원들은 산채품들을 출품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저 가방 속에 산반 한포기 쑤셔놓고, 남들이 채란한 난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지난번 송년 산채시에 중투를 했으면 되었지 뭘 또? 하는 생각으로 출품된 난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K아우님이 찬조한 중투가 행운상으로 나왔고 나는 추첨으로 행운상에 당첨되어 중투를 받았다. 이런 행운이 내게로? 송년산채에서 난생 처음 중투를 만났었는데, 시산제에서 또다시 중투를 행운상으로 받다니 蘭복이 많은 건지, 人福이 많은 건지, 善行을 많이 베푼건지.....
'‘아니야, 이건 작년에 내가 살려준 토선생이 내게 보내준 선물이야.“(k아우님이 이해하시겠지)
다음 날. 눈앞의 울창한 소나무 숲을 바라보면 저절로 시가 읊어지고 시조가 나올법한 곳을 쳐다보면서 우리 일행은 작전회의를 했다. 좌측으로 엄폐와 은폐로 조용히 접근, 계곡을 따라 고지를 점령하고 우측으로 돌면서 계속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생포할 것은 모두 생포 할 것! 이런 작전회의 후에 등산로를 따라 높은 포복과 낮은 포폭으로 전진을 했다. "어라? AC! " 앞서가던 누군가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나온다. 가만히 보니 등산로 따라 보이는 춘란! 그리고 흔적! 그 흔적의 의미를 난을 하는 난인들은 알리라.... 벌써? 누군가? 실망감이 든다. 우리네들이 찾는 곳은? 아무도 찾지 않았던 전인미답의 산지 아니던가?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이 보이면 힘이 빠지는 건 蘭人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다. 그래! 이미 봤어도 자기가 다보았을라고? 나머지나 보아야지... 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으면서 탐란을 하는 것이 우리네 탐란방법이 아니던가? 그러나 초입의 등산로에 나타난 발자욱은 왼쪽의 대나무 숲으로 유령처럼 사라져 버리고 전인미답의 신천지가 펼쳐짐을 우리네들은 상상을 하지 못했다. 바닥은 무척 깨끗했다. 수 십 년, 수 백 년 된 소나무 사이로 다른 잡목이 성장할 수 없어서 바닥은 노란 솔잎... 노란 소갈비의 부엽토로 덮힌 지역이었다. 아! 구수한 부엽토 냄새! 산에 자주가보면 정말로 부엽토 냄새가 구수함을 느낄 수 있다.
등산로를 벗어난 지 오 분 여 만에 K아우님이 기화를 했다고 소리친다. 왠지 내가 기분이 좋다. 나도 뭔가를 할 것 같아서이다. K아우님의 기화는 투구화는 아니지만 꽃잎이 설화된 기화였다. 축하 혀! 간단히 축하 인사를 하면서 전진, 전진 또 전진하여 정상이 눈앞에 보이는 8부 능선에 이르렀다. 여기서 우측으로 턴하자고 육성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나타난 계곡으로 오르락 내리락 오르락 내리락 하기를 여러 번. 눈 앞에 춘란이 보였다. 그것도 엄청난 대주가 있었다. 슬며시 대주 사이에서 꽃대를 하나 까 본다.
“어라? 이놈은? 주금이네!”, 믿지 못해 하나 더 까본다. 틀림없다.
“어이 J 아우님! 주금이네. 와 봐!” 금방 달려온 J 아우님 그 예리한 눈으로 살펴본다.
“자식! 내가 니 보다 먼저 주금을 터득했어! 내 눈에 주금이면 주금이야. 골사이의 주금색을 읽어 봐! 짜식! 이걸 아니라고 우기면 넌 죽음이다!” 속으로 맹구가 떠벌린다.
“형님 축하합니다!” 하면서 그 아우님 손수 갈고리로 난을 캔다. 캔 후에 보니 촉수는 한 이십 여 촉, 벌브는 삼십 여개, 뿌리 길이는 50센티 정도, 잎 역시 길다. 섬 초 마냥 길어서 볼품없는 난! 하지만 올 첫 주금인디....색이 마음에 드는데... 대주인디...맹구는 葛藤에 빠졌다.
“이걸 어찌 분배한다?”
결국 잠시 갈나무와 등나무 사이에서 헤매던 맹구는 삼등분 했다. 벌브 한 부분, 성촉은 둘로. 성촉중 하나를 이등분. 그래 바로 이거야! 벌브는 나중에 다른 사람 주고 이등분 된 성촉의 반은 내가 갖고 나머지를 또 이등분 내서 둘이 나누어 주어야지... ㅎㅎㅎ!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 황금비야! 분배의 방법을 정한 나는 그 큰 난들을 가방에 넣었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를 쳐들고 나 여기 있수 ! ...하면서 고개를 드는 놈들 -내 물건도 이 놈처럼 자주 고개를 들면 좋으련만- 때문에 배낭 가방을 열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산행을 해본 사람들 안다. 대주의 춘란에서 별 다른 소득이 없다는 것을...하지만 맹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대주에서 대박을 해냈다. 하지만 나의 주금 채란은 서곡이었다. 나의 주금을 시작으로 위에서 탐란을 하던 J 아우님이 하는 말
“형님 이거 봐주세요!” 달려가 보니 주금이었다. 추카! 추카! 그것도 대주!
잠시 후 하단부를 탐란하던 K 아우님!
“형님! 이것도 봐주세요!” 달려가 보니 역시 주금! 추카추카!
한시름 덜었다... 내가 캔 주금을 어찌 분배하느냐?의 고민이 해결된 순간이었다.
일행 모두 주금을 채란했으니......나를 이어 J, K아우님들이 주금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계곡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채란한 주금들. 모두가 대주였다. 골사이에 주금색이 들어 있는 것, 하단부 부터 색이 보이는 것, 상단부 부터 색이 들어오는 것, 그리고 전반적으로 은은히 형광색 마냥 주금색이 비치는 주금 등이 혼재되어 있는 산지였다.
다른 꽃들도 전반적으로 황색의 색소를 포함한 꽃들이 많았다. 그 많은 주금 중 셋 중 일행 둘이서 합의를 보지 않으면 캐지 않았고, 끼가 보이는 건 모두 다음 사람을 위해 남겨 두었으며, 우리 일행들은 성촉만 정리하고 벌브와 약한 것들은 다시 심어주었다. 나는 정상 부근에서 서산반을 한 촉 발견. 이것도 생포했다. 주금밭에서 서산반이라! 나중에 홍화가 필 확률이 높아지지 않겠는가? 정상부근에서 보이기 시작한 타인의 발자국(욱). 아!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들 갔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조그만 더 반대편을 보았더라면 오늘의 소득은 없었을 터인데..
이제는 난보기가 지겨웠다. 아니 무서움이 들기 시작했다. 보는 것 마다 주금이니 제발 주금이 아니기를 바라며 탐란을 마무리한 산행이었다. 하다못해 아직도 볼 것이 많은데도 산행을 서둘러 종료하자고 서로 채근하여 산행을 마쳤다. 한마디로 무서움이 깃들어 있는 산. 처녀지도 아닌 곳에 이렇게 많은 주금이! 주금의 장소! 죽음의 장소! 공동묘지!
제발 공동묘지인 이 산에 대해 묻지 말아주세요. 전 모릅니다! 나이를 먹다보니 기억력이 떨어지고 이렇게 소설 한편 쓰기도 힘듭니다.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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